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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살고 있었네” 국립서울병원 취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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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 :2008-06-18

“사람이 살고 있었네” 국립서울병원 취재기

<정신의 경계에 들어서다>

정문을 들어서자 본관 건물 너머 멀리 용마산의 이마가 시원하게 펼쳐졌다. 오후 두 시. 3층 규모의 본관 앞 잔디밭에 환의를 입은 환우 두 명이 해바라기를 하고 있었다. 쌀쌀한 날씨 탓에 한 명은 병원 마크가 찍힌 붉은 가운을 덧입고 있다. 말을 걸었다. 김영식(가명·41), 이준수(가명·46)라고 자신들을 소개했다. 낯선 사람을 경계하지는 않았다. 분위기를 풀기 위해 그들에게 담배를 권했다.

영식 씨는 20년 전 발병, 사설 병원을 전전하다가 2002년 3월 국립서울병원에 첫 입원했다. 이후 일곱 차례나 입·퇴원을 반복했다고 한다.

1987년 발병한 준수 씨는 기억나는 사설 병원 입원 횟수만 여섯 차례다. 그러나 비싼 진료비를 감당하지 못했다. 병도 호전될 기미가 안 보였다. 그의 부모는 1992년, 국가가 운영하는 국립서울병원에 그를 입원시켰다. 이후 입·퇴원을 반복했다.

퇴원한 후의 생활이 궁금했다.

“병원에서 재활센터를 소개시켜줘요. 그곳에서 같은 병을 가진 동료들과 사귀고요. 부모님이 슈퍼를 운영하기 때문에 계산대 일이나 물건 운반 일을 도와드렸어요. 그러다 재발하면 입원하고.”

영식 씨는 육체적으로 버거운 일은 못한다. 스트레스가 쌓이는 일은 더 그렇다. 병이 악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준수 씨는 퇴원하면 일거리를 찾아다녔다. 채용하는 곳은 없었다. 그러나 스스로 길을 뚫어야 했다. 조금이라도 부모에게 손 벌리지 않을 정도의 돈을 벌 수 있는 곳이라면 머리 숙이고 들어갔다. 지하철 택배, 도서관 책 정리, 자재운반 등 단순노동이 그의 일거리였다. 오래 꾸준히 다닐 수는 없었다. 스트레스를 받아 재발할까봐 조심해도 병은 그를 따라다니며 괴롭혔다.

무엇이 가장 두려운가? 물었다. 둘 다 ‘재발’을 꼽았다. 그리고 ‘일을 해야 하는 현실.’

삶의 불안감은 병원의 환우에게도 세상의 일반인에게도 다르지 않았다. 환우는 그 부담감이 일반인에 비해 조금 더 클 뿐이다.

현재 이들은 본관 건물 3층에 위치한 폐쇄 병동에 입원해 있다. 산책 시간은 오후 2시부터 4시까지. 반면 우리나라 최초의 낮 병동이 있는 1층의 개방 병동 환우들은 낮 시간대에 산책이 자유롭다. 증세가 호전된 환우들이기 때문이다. 현재 국립서울병원은 일반 병동(폐쇄·개방 병동)을 비롯해 응급 병동, 노인 병동, 결핵과 약물·알코올중독 환우를 위한 특수치료 병동, 소아청소년 병동이 있다. 모두 마음이 아프기 때문에 오는 이들이다. 아프지 않다면 이곳은 그저 지나가는 이의 풍경에 불과할 것이다.

하루 일과를 물었다. 오전 6시30분 기상. 일어나지 않으면?

“그런 거 없어요. 단체 생활이기 때문에 의무적으로 일어나야 해요.” 오전 7시30분 아침 식사에 이어 9시에 아침 투약 시간이 있다. 단체로 먹는데 약 복용 여부를 어떻게 아는가?

“간호사가 검사 하죠. 혀 밑에 약을 감출까봐 혀를 세우기도 하구요. 어쨌든 다 먹게 돼요.”

말을 하는 영식 씨가 잠시 웃었다.

점심 식사는 오전 11시30분이다. 증상이 심한 환우는 이때도 투약을 한다. 영식 씨가 있는 병동에는 현재 60여 명이 생활하고 있으며, 15명 정도 하루 세 번 약을 복용하고 있다. 나머지는 아침·저녁 두 번만 투약한다.

오후 5시30분 저녁 식사. 이어 오후 6시20분 저녁 투약을 한다.

잠은 몇 시에 자나?

“밤 아홉 시요.” 단체로? “단체로 자요.”

생활이 답답하지는 않나?

“처음 오면 갑갑하죠. 병동에서 테레비나 보고 산책 하고, 그러다가 적응하게 돼요.”

환우 중에는 병원 생활을 견디지 못해 달아났다가 다시 들어온 이들도 있다. 그러나 퇴원했다가 재발하면 자청해서 이곳에 재입원하는 이들도 드물지 않은 형편이다.

 

<재발이 두려운 사람들>

본관 지하 매점 휴게실에서 만난 송철호(가명·45) 씨는 테이블 앞 의자에 앉아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얼굴이다. 인사를 했다. 그는 경계를 했지만 곧 긴장을 풀고 대화에 응했다. 2년 전에 발병했다고 한다. 국립서울병원에 입원해 6 개월간 지냈다. 호전된 듯 했지만 3개월 만에 재발해 6개월 재입원했다. 퇴원. 그러나 보름 만에 또 재발했다. 아내와는 이혼했으며 아들은 아내가 데려갔다고 한다.

외롭지 않은가? 기자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는 고개를 조금 숙인다. 무표정한 얼굴이다. 그러나 오랜 입·퇴원으로 빈궁해진 가족이 용돈을 풍족하게 줄 수는 없다. 병원은 가족이 맡긴 돈에 맞춰 폐쇄 병동 환우들에게 하루 1000~2000원의 용돈을 지급한다. 개방 병동은 일주일 단위로 1만2000원~2만 원을 지급한다. 가족이 용돈을 맡기지 않은 경우, 환우는  군것질도 할 수 없다.

밥은 어떤가?

“밥, 국, 반찬 네 가지. 돼지고기, 닭고기도 일주일에 두 번 정도 나와요.”

남겨도 상관은 없다. 대신 싱겁게 나온다고 그는 말했다.

매점 출입구 근처의 공중 전화기에서 한 여환우가 카드를 넣고 버튼을 누르고 있다. 그러나 받지 않는지 수화기를 든 그녀의 어깨가 축 늘어진다. 한숨을 쉬는 것일까?

철호 씨가 일어섰다. 휑한 복도를 따라 느릿느릿 걷는 그의 뒤를 따라갔다. 3층 폐쇄병동 철문 앞. 일반인은 들어갈 수 없다. 기자는 입구에 적힌 문구를 바라보았다: ‘용무가 있으신 분은 벨을 눌러주세요’

산책로에서 여 환우 두 명을 만났다. 이민영(가명·24)씨와 송은정(가명·33)씨.

민영 씨는 17살 때 첫 발병해 사설 병원에 4 차례 입원했다. 국립서울병원에는 지난 해 11월에 입원했다고 한다.

은정 씨는 히스테리 증세로 올 해 1월에 입원했다. 그녀는 정몽준 현대그룹 회장의 자살 이후 정신적 충격과 외상 후 스트레스 증세를 겪고 있다고 호소했다. 유명한 민간 시설에서 영어 강사를 했는데, 정 회장의 죽음 이후 권력층에서 자신을 협박했다고 한다. 망상 증세(비현실적인 믿음)를 보였지만, 대화하는 데 어려움은 없었다. 오히려 그녀는 논리적이고 달변이었다. 언제 퇴원할지는 자신도 알 수 없다고 했다.

퇴원하면 사는 게 불안하지 않은지 물었다.

“난 영어 강사였어요. 돈도 꽤 벌어봤어요. 퇴원하면 월~목까지 일하고, 금토일은 여행을 다닐 거예요. ”

은정 씨는 4살, 8살 된 두 아들이 있다고 했다. 남편과는 별거, 결합, 이혼, 재결합의 과정을 거쳤다. 아이들은 시댁에서 데려갔다고 말했다.

그래도 먹고 살아야 하지 않는가? 기자의 질문이 어리석었는지 미정 씨는 한마디를 툭 내뱉었다.

“꿈 꿀 권리는 있지 않나요?”

민영 씨는 뮤지션이었다. 한때는 독특한 음색으로 장래가 촉망됐다고 은정 씨가 거들었다.

“스토커가 있었어요. 그 스토커가 딴 여자를 사겼는데 그 여자까지 나를 괴롭히는 거예요. 지들끼리 잘 살지 왜 나까지 괴롭히나 싶어서 괴로웠어요. 그래서 걔들 앞에서 주먹으로 유리창을 깼는데 오른손이 나가버렸어요.”

이 일로 그녀는 입원을 했다. 강제 입원한 경우다. 실제 그녀의 오른손은 상처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대화 도중에도 오른손의 약지와 새끼손가락이 자꾸 곱아드는 게 보였다.

민영 씨는 청소년병동에 입원해 있을 때 달아났다가 실패한 적이 있다. 그녀는 그때 일을 두고 ‘신데렐라 슬리퍼 사건’ 이라고 말했다.

“열일곱 살 때 입원했어요. 산책 나갔다가 집에 가려고 막 뛰었어요. 한참 뛰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슬리퍼 한 짝이 없는 거예요. 다시 온 길을 되돌아왔다가 병원 직원들에게 잡혔어요. 내가 무슨 신데렐라라고 슬리퍼를 슬쩍 떨어뜨렸는지.”

민영 씨는 이 대목에서 깔깔 웃었다. 문득 근심 없는 꼬마아이의 옆모습을 보는 착각이 들었다.

이곳에서의 생활은 어떤가?

은정 씨가 말했다. “이곳도 사람 사는 세상이에요. 환우끼리 싸우기도 하고 그러면 벌칙으로 보호방에 갇히기도 하고 그래요. 사회에서도 잘못한 이들이 경찰서 가잖아요.”

보호방은 일종의 독방이다. 침대 하나를 놓으면 옆으로 손바닥만 한 공간이 남는다. 무단 행동을 하거나 환우끼리 싸울 경우 이곳에 들어가 24시간 생활한다고 한다. 국립병원이지만 환우에 비해 직원 수가 부족한 병동 측으로는 부득이한 측면이 있을 것이다. 그 정도의 경중은 사회가 판단할 일이다.

산책 시간이 끝나가고 있었다. 앞서 가는 민영 씨가 돌아보며 빨리 오라며 재촉한다. 그러면서도 여유가 있는지 까르륵 웃는다. 그 뒤로 은정 씨가 느릿느릿 걷는다. 어쩌면 그녀는 알 것이다. 그 안에는 자신을 기다리는 것이 없다는 것을. 그러나 견뎌야 한다는 것을.

<여기도 또 하나의 세상>

매점 바깥의 야외에는 자판기와 나무 벤치가 있다. 오후 네 시. 십여 명이 벤치의 나무 의자에 앉아 햇볕을 쬐고 있다. 한때 이곳에 입원했거나 퇴원 후 외래 진료를 받는 사람들이다. 오랜 투병 생활로 자립할 기회를 놓친 이들이어서 대부분이 기초수급자로 지정돼 국가 보조금으로 생활하고 있다.

도영철(가명·44) 씨는 병원 인근에 집이 있어서 자주 이곳을 찾는다. 대학을 다니던 23살 때 발병했다고 한다. 병 인식도 없이 군에 입대했다. 그리고 의가사 제대. 그간 몇 번이나 입·퇴원을 했는지 그는 기억하지 못한다.

“칠 년 전에 퇴원한 게 마지막이에요. 두 달에 한 번씩 외래 들러서 두 달치 약을 타서 갑니다. 마땅히 갈 곳이 없으니까 늘 이곳에 와요.”

생활은?

“어머니, 남동생과 살아요. 기초생활수급자여서 월 40만 원 정도 나라에서 나와요.”

곁에 앉은 강민수(가명·34) 씨 역시 갈 곳이 없어서 자주 이곳에 들른다. 10년 전 발병해 국립서울병원 입원했다. 더 이상 입원은 안했지만 불안 증세는 늘 있다고 한다. 취직을 해도 오래 못 견디고 나오는 게 태반이다. 최근에는 생산직에 들어갔다가 그만두었다.

가장 불안한 게 뭔지 물었다.

“대인 공포다, 그게 무섭다.”

집에 가야겠다고 일어서는 영철 씨를 민수 씨가 한사코 붙잡는다. 혼자 있는 것에 대한 불안감이 민수 씨를 괴롭게 한다. 보다 못한 영철 씨가 주저앉았다.

기자가 경계의 대상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되자  어떤 이는 자판기 커피 한 잔만 뽑아 달라고 부탁했다. 경제적 통증을 앓는 이들. 병동 환우들 역시 예외는 아니다. 개방 병동 환우들의 경우, 일주일치 용돈 1만~2만 원으로 빵 사먹고  사나흘 만에 돈이 다 떨어진다. 그래서 그들은 친해지면 커피 한 잔을 달라고 떼를 쓴다. 상부상조인 셈이다.

다음 날 오전 11시. 매점 휴게실에는 환우를 면회 온 가족들이 보였다. 대부분이 어머니들이었다. 양해를 구하고 자리에 앉아 질문을 했다. 다음은 질문과 답변이다. 응답한 이는 네 명이지만 지면에서 신원을 밝히지는 않았다. 환우의 가족들에겐 공통된 감정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공교롭게도 환우인 아들들의 연령은 모두 40대 이상이었다.

일주일에 몇 번이나 면회 오나?

“두 번도 오고 세 번도 오고. 안 올 때도 있어요. 한 달 정도.”

국립서울병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특진 60만원, 일반 45만원. 국가가 운영하니까 국가유공자나 기초생활수급자는 무료예요. 인권도 존중하고 간호사들이 환우에게 반말 안하고 높임말 써요.”

“아들 발병하고 처음 입원한 곳이 사설 A 병원이었어요. 2주 후에 면회 신청했는데 얼마나 약을 먹여놨으면 침을 질질 흘리고... 약부작용이 얼마나 심했는지. 바로 그 자리에서 퇴원 신청했어요. 논산에 있는 기도원에도 들어갔는데 식대 십만 원 받고 애를 얼마나 두드려 팼는지 몰골이 형편없어. 약도 안주고 오직 기도, 찬송만 하라고 하니 기가 막히지. 국립서울병원에는 5~6 차례 입원했어요.”

이들은 아들 병에 대해 모두 담담해졌다고 입을 모았다.

무엇이 염려스러운지 묻자, “자기 앞을 못 꾸려나가니까 그게 제일 걱정”이라고 말했다. 대답을 한 그녀는 곁에 다소곳이 앉아 있는 나이 마흔 살 넘은 아들의 손을 잡았다. 긴 시간, 그녀는 울었을 것이다. 이미 눈시울이 붉게 젖어 있다.

다른 자리의 40대 아들은 어머니가 온 것이 좋은지 연신 이야기에 끼어들었다. 노모가 아들을 향해 눈을 흘겼다.

“속이 상해서 말을 안 하려고 했는데 가만히 있으니까 그냥.”

주책없이 말을 해대는 아들이 미운가 보다. 주변의 어머니들이 “괜찮아, 왜 말도 하고 그러는 거지” 하며 달래준다. “퇴원하고 집에 오면 말도 없는 놈인데, 이런 데서는 (말을 막 해대고). 이번에 오면 외박신청하려고 했는데 저 놈이 미우니까 취소하고 싶네.”

외박이 가능한지 물었다.

“환자에 따라 틀려요. 할 수 있는 환자도 있고 안 그런 사람도 있고. 나는 워낙 오래 됐고 아들도 상태가 괜찮으니까 병원측이 알아서 해줘요.”

집에 데려가서 하루 음식을 해 먹이고 들여보낼 생각이라고 했다.

전라도 사투리를 쓰는 여인이 말을 받았다.

“우리 아들은 어제 전화가 왔어. 엄마 내일 갈랑게 전화 말어라 했더니 저녁에 또 왔어. 왜 했냐, 내가 너 때문에 제 명에 못산다 했더니 전화 했는지 안 했는지 몰라서 했다고 하더라고. 내 아들이지만 그게 사람이여. 지가 지 발로 여기 입원하고 싶다고 해서 옳다구나 했지. 약 지으러 가자 해서 입원시켰더니 엄마가 날 속였다고 난리를 쳐대는데.”

테이블 주변에는 삼십 대 중반으로 보이는 남성이 컵라면을 먹고 있는 간호사들에게 다가가큰 소리로 자신을 소개하고 있다. 그의 이야기를 종합해 보았다: ‘아시아연합대 정치학과 졸업, 자기 어머니는 이곳 병원장이고 아버지는 대통령 비서실장. 그리고 자신은 모 지역구 국회의원.’

곳곳에서 한바탕 웃음이 터졌다.

“뭐라고 그러는 거여?”

“몰라. 지 아부지가 대통령 밑에 비서실장이래. 지 엄마는 여기 병원 대표고.”

그제서야 여인들이 깔깔 웃어댄다.

<우리 아들, 나아서 엄마랑 살다가 죽자, 잉?>

오전 12시. 매점 안은 간호사들과 환우들, 면회 온 이들의 웃음과 대화로 한바탕 시끄럽다. 잠시 삶의 에너지가 들끓고 있는 듯 했다. 대화 소리가 잘 들리지 않을 정도다.

그 와중에 40대 아들이 늙은 어머니를 조르고 있다.

“엄마, 사이다 사줘.” “안돼.” “사줘요.” “돈이 문제가 아냐. 너한테 안 좋으니까 그래." “너는 어떻게 내가 오면 가만히 앉아 있지를 못하냐. 엄마 힘들어 죽겠다. 가서 물이나 떠와라.” “네.”

아들은 거부하지 않고 냉큼 달려간다.

전라도 말씨의 여인이 아들에게 당부한다. 그 모습이 진지하다.

“너 엄마랑 있는데 암시랑토 않냐? 정신 똑하니 차려야 혀. 너 엄마 죽으면 형제간도 다 필요 없어. 정신 차려서 얼릉 엄마 살아 있을 때 나아라, 잉?”

아들이 고개를 주억거린다.

“용서해 주세요.” “후딱 나서라(나아라).” “네에...” “우리 안현수(가명), 나아서 엄마랑 그냥 살다가 죽자, 잉?” 기분이 좋아진 아들이 한마디 한다. “나아서 나 거기 다닐 거야.” “워디(어디)?” “공무원” 모두 하하 웃는다. “공부를 안했는데 어떻게 공무원 해?” “몰라.”

다시 웃음이 터졌다.

기자는 매점을 나섰다. 오후의 햇살이 따가웠다. 누군가가 말했다. 정신병원이라는 단어는 상처 없이 바라볼 수 없었다고. 온전해도 살아가기 힘든 세상에 골방에 갇혀버린 부서진 정신에 대한, 그 가족에 대한 연민이었으리라.

지난 해 9월, 이 병원 정문 앞에서 시위가 열렸다. 병원이 위치한 광진구 중곡동 주민들을 대표한다는 대책위원회가 국립서울병원 이전을 촉구하는 궐기대회였다. 환자 요양을 위해 ‘산 좋고 물 좋은’ 곳으로 떠나라는 명분이었지만, 실상은 이 병원 때문에 집값이 수십 년간 정체돼 손해보고 있다는 억울함의 성토였다. 그들은 꽹과리를 치고, 북을 두드리고, 함성을 지르고, 확성기로 병원을 성토했다.

환우와 환우의 가족들은 그날 무슨 생각을 했을까? 오랜 시간 편견에 시달려왔기 때문에 어쩌면 시위대를 향해 떳떳하게 항의도 못했을 것이다. 존엄성이 파괴된 자리에 찍힌 ‘혐오’와 ‘낙인’의 화인(火印)이 그들 몫이라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낡은 수첩을 펼치듯 기자는 그 질문 앞에서 잠시 망설였다. 그날, 저 시위대에게 환우와 병원은 제거해야할 대상에 불과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혐오 시설’로 인식하는 이곳에서도 사람들은 웃고, 울고, 살아가고 있다. 사람이 살고 있는 곳이었다. 그 존엄함을 누구도 건드려서는 안 된다.

정문에서 뒤를 돌아보았다. 멀리 용마산의 이마가 환하게 봄을 알리고 있었다.

박종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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